굳이 수련을 한다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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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 이제부터 내가 랩을 시작한다

는 말은 예술가의 자신감 가득한 말이다. 정형돈의 랩을 오마쥬한 개코의 이 가사는 참 듣기 좋다.

4월 이후로 본격적인 운동을 하지 못한지 세달 정도 되었다. 물리치료를 일반 정형외과에서 한의원으로 바꾸었고 봉침 치료를 병행하면서 차도가 좋다. 아직은 불안하지만 3키로 정도 달리기를 시작했고 3주짜리 아쉬탕가 워크샵을 앞두고 집에서 가볍게 아쉬탕가 수련을 시작했다. 아쉬탕기로의 복귀를 무려 집에서.

지난해 여름 많은 것들을 내려 놓기 위해 독일로 떠난 이후 부상과 사고를 반복하면서 내 몸이 정체 상태에 있다고 느꼈다. 숨을 따라가보았던 오늘 나의 몸보다 정체된 것은 나의 마음이라 생각했다. 수련이 아닌 운동을 하고 있는 마음. 차마 혼자선 나를 매트 위로 이끌지 못해 요가원을 가서 선생님에게 기대는 마음 - 스승의 날에 쓴 일기 중에서

부상을 포함한 여러가지 이유로 다시금 몸의 상태를 끌어올려야 할 때면 언제나 정체된 몸을 탓했으나, 스승의 날을 이후로 정체된 것은 나의 마음이라는 것을 생각한다. “집에서 이제 혼자 수련해보려구요” 라는 핑계로 몇달 전 소영선생님에게 받은 매트를 민망한 마음으로 펴본다. ‘차마 혼자선 나를 매트 위로 이끌지 못했던 마음’을 잘 다독이며 오랫동안 요가원조차 나가지 못했던 굳어버린 몸을 이끌고 혼자 매트 위에 선다. 매트 위에 서서 바람에 날리는 나무들을 보고 있으니 괜히 수리야나마스까라를 시작할 용기가 생기는 기분이다. 뻣뻣해진 몸보다 중요한건 매트에 홀로 설 수 있는 마음이구나, 나의 수련은 그럼에도 나아가고 있구나를 생각한다. 이러나 저러나 흐르는 시간이지만 그럼에도 굳이 매트에 올라 아쉬탕가 수련을 시작한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해? 하며 하는 일들과 굳이 꼭 해야해? 하며 하지 않는 일들 사이에 어딘가 나의 선택들이 있다. 오늘 혬으로부터 비영리계의 백종원이야? 라는 우스갯소리를 듣고 꽤나 마음에 드는 별명이라 생각했다. 내가 굳이 하려는 것들과 굳이 내가?라며 하지 않는 것들. 나는 그 사이에 있지 못하고 그 끝에 있을 뿐이다. 줴프가 내게 해준 공자의 이 말을 떠올린다. 나의 30대는 불혹이 되어 미혹하지 않는 삶에 다다르기 위한 시간들일까.

‘나는 15세가 되어 학문에 뜻을 두었고(吾十有五而志于學), 30세에 학문의 기초를 확립했다(三十而立). 40세가 되어서는 미혹하지 않았고(四十而不惑) 50세에는 하늘의 명을 알았다(五十而知天命). 60세에는 남의 말을 순순히 받아들였고(六十而耳順) 70세에 이르러서는 마음 내키는 대로 해도 법도를 넘어서지 않았다(七十而從心所欲 不踰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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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조카, 이솔이는 왜 이렇게 사랑스러울까? 공진단을 사드리고 난 뒤 수화기 너머의 어머니 목소리가 조금 바뀐 듯한 기분은 기분 탓일까? 보고싶은 복숭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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